영 톰 모리스의 삶은 골프 코스 위에서는 눈부신 영광의 연속이었지만, 그라운드 밖에서는 한 젊은이의 고뇌와 비극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특히 아버지 올드 톰 모리스와의 관계는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아픈 축이었다. 두 사람은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을 넘어, 당대 최고의 골프 부자이자 스승과 제자, 그리고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다. 함께 디 오픈의 영광을 나눴고, 챌린지 매치에서 한 팀을 이루며 골프 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들의 유대감은 골프계의 전설로 통했다. 그러나 이처럼 단단했던 부자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영 톰의 '사랑' 때문이었다. 1874년, 영 톰은 마거릿 드루리(Margaret Drinnen)라는 여성과 결혼을 발표했다. 영 톰은 마거릿을 만난 후 빠르게 깊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그들은 만남 초기에 이미 육체적인 관계를 맺을 정도로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렸다. 하지만 마거릿에게는 복잡한 과거가 있었다. 그녀는 영 톰보다 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관계에서 사생아를 낳았던 전력이 있었다. 비록 그 첫 아이는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는 물론 교회에서조차 '낙인찍히고
영 톰 모리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단순히 압도적인 우승 기록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19세기 골프의 판도를 바꾼 '기술 혁신가'이자 '스타 플레이어'로서 현대 골프의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다. 당시의 골프는 주로 신중한 플레이와 예측 가능한 샷이 주를 이루었으나, 영 톰은 이러한 보수적인 틀을 깨고 더욱 공격적이고 창의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선보이며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그의 플레이는 단순히 힘을 과시하는 것을 넘어, 정교한 기술과 대담한 전략이 결합된 예술에 가까웠다. 영 톰의 혁신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그의 신체적 특징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 올드 톰 모리스보다 큰 약 173cm(5피트 8인치)의 키에 단단하면서 강인한 체격, 특히 매우 강한 손목을 지녔다. 이러한 체형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강력하고 유연한 스윙 아크를 만들어낼 수 있게 했으며, 이는 그의 파워풀한 드라이브 샷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젊고 건장한 육체는 단순히 공을 때리는 것을 넘어, 공에 다양한 스핀을 걸고 궤적을 조절하는 섬세한 기술을 구현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가 발명하고 대중화시킨 가장 혁신적인 기술 중 하나는 바로 '백스핀(Backspin)'이었다. 당시에
윌리 파크 시니어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윌리 파크 주니어와 멍고 파크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22일부터 이틀간 미국 플로리다주 리츠-칼튼 골프클럽(파72)에서 열리는 PGA 투어 비공식 이벤트인 PNC 챔피업십에는 이들 파크 패밀리를 기억해야 한다. 1860년 처음 열린 디 오픈 초대 챔피언은 20대의 라이징 스타 윌리 파크 시니어(1833-1903)였다. 초기 챔피언들이 그렇듯이 윌리 파크 시니어도 캐디로 골프를 시작했고, 디 오픈 1회 대회에 당시 가장 유명한 올드 톰 모리스를 2타차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초창기 골프 대회의 우승자는 파크 가문과 모리스 가문이 차지했다. 1860년 윌리 파크 시니어 (1) 1861년 올드 톰 모리스 (1) 1862년 올드 톰 모리스 (2) 1863년 윌리 파크 시니어 (2) 1864년 올드 톰 모리스 (3) 1865년 앤드류 스트래쓰 1866년 윌리 파크 시니어 (3) 1867년 올드 톰 모리스 (4) 1868년 영 톰 모리스 (1) 1869년 영 톰 모리스 (2) 1870년 영 톰 모리스 (3) 1871년 연속 3회 우승으로 챔피언 벨트를 영 톰 모리스가 가져감으로 인해 대회 최소 187
아버지의 엄격하면서도 세심한 가르침, 그리고 에어 아카데미에서의 특별한 교육 환경 속에서 영 톰 모리스의 골프 재능은 놀라운 속도로 만개했다. 그의 이름이 전 세계 골프계에 각인된 것은 1868년, 바로 디 오픈 챔피언십(The Open Championship)에서였다. 당시 17세 5개월 8일의 나이로 출전한 영 톰은 이 대회에서 154타라는 경이로운 스코어를 기록하며 챌린지 벨트를 품에 안았다. 이 기록은 디 오픈 역사상, 그리고 남자 골프 메이저 대회 역사상 최연소 우승이라는 불멸의 대기록으로, 15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골프 역사에는 영 톰 모리스처럼 어린 나이에 천재성을 발휘한 선수들이 존재한다. PGA 투어 최연소 우승 기록은 18세 6개월 9일의 찰스 코치스(Charles Kocsis, 1931년 미시간 오픈)가 가지고 있으며, 현대 골프의 아이콘 타이거 우즈(Tiger Woods)도 20세 9개월 6일에 첫 PGA 투어 우승을 거머쥐었다. 메이저 대회로 범위를 넓혀보면, 영 톰 다음으로 젊은 우승자로는 존 맥더모트(John McDermott, 19세 9개월, 1911년 U.S. 오픈)가 있으며, 타이거 우즈는 21세 3개월에
영 톰 모리스, 본명 토머스 미첼 모리스 주니어, 그의 탄생은 스코틀랜드 골프 역사에 한 줄기 빛을 던지는 사건이었다. 1851년 4월 20일,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태어난 그는 '골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드 톰 모리스와 낸시 베이(Nancy Bay)의 아들이었다. 그의 출생은 올드 톰이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던 시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1840년대 말, 올드 톰은 스코틀랜드 골프의 거장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앨런 로버트슨의 견습생으로 일했으나, 구타페르차 볼(gutta-percha ball) 사용을 둘러싼 갈등으로 로버트슨과 결별하고 1851년 프레스트윅(Prestwick)으로 이주했다. 영 톰의 탄생은 모리스 가문의 새로운 시작을 상징했으며, 이 환경 속에서 그는 골프에 둘러싸인 특별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아버지 올드 톰 모리스는 프레스트윅으로 이주한 후, 그곳에서 그린키퍼이자 클럽 및 볼 제작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프레스트윅 골프 클럽의 코스를 설계하고 관리했으며, 이는 1860년 디 오픈 챔피언십 창설의 기반이 되었다. 반면, 올드 톰이 캐디 출신으로서 맨땅에 헤딩하듯 골프계에 뛰어들어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면, 영 톰은 아버지의
프롤로그: 시간의 장막을 뚫고 빛나는 짧고도 강렬한 별 골프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스포츠다. 그 긴 시간 속에서 수많은 위대한 선수들이 탄생했지만, 일부는 단순히 뛰어난 기량을 넘어선 존재로 기억된다. 스코틀랜드의 바람 부는 링크스에서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다 간 영 톰 모리스(Young Tom Morris, 1851년 4월 20일 ~ 1875년 12월 25일)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토머스 미첼 모리스 주니어(Thomas Mitchell Morris Jr.)이다. '골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드 톰 모리스(Old Tom Morris)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지지 않고 독자적인 빛을 발한 전설로, 그의 아버지와 비교해서 영 톰 또는 토미라고 불리어졌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의 골프 슈퍼스타', '골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동'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19세기 골프의 시대를 평정했던 그는, 단순한 우승 기록을 넘어선 혁신적인 플레이 스타일과 시대를 앞선 카리스마로 골프의 대중적 인기를 견인했다. 실제로 2009년 9월 '골프 매거진'이 발표한 역대 최고 골퍼 설문조사에서 영 톰 모리스는 14위에 오르며 19세기 선수 중
※본 기사는 본사와 제휴한 조세금융신문과 동일하게 게재한다. 라이벌 윌리 파크 시니어 1859년 스코틀랜드 골프계에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챔피언 골퍼 앨런이 영면에 들어간 것이다. 앨런은 세인트 앤드류스의 최고 골퍼이자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프로 골퍼, 최초의 챔피언 골퍼였다. 44살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앨런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스승이자 최고의 골프 파트너였던 앨런의 장례식에서 참석해서 직접 운구를 한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스코틀랜드 골프계는 그의 타이틀인 챔피언 골퍼를 이어받을 골퍼를 뽑게 되고, 제임스 오길비 페어리를 주축으로 디 오픈 챔피언쉽이 조직된다. 바로 디 오픈의 시작이다. ‘존경할 만한 캐디(respectable caddie)’로 알려진 프로 골프 8명이 영국과 스코틀랜드 골프 클럽을 대표해서 초청되었고, 우승자에게는 챔피언 벨트(Challenge Belt)가 수여되고, 3회 연속 우승자는 우승 벨트를 영구 소장할 수 있도록 했으며, 12홀 프레스트윅 골프 클럽에서 3라운드 경쟁을 통해서 우승자를 뽑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최초의 디 오픈은 압도적으로 톰에게 유리한 경기였다. 그가 만든 코스 그리고 지난 10년간 관리해온 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