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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대중의 골프히스토리] 영톰모리스 3부. 혁신적인 플레이 스타일 – 기술 골프의 서막을 열다

 

영 톰 모리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단순히 압도적인 우승 기록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19세기 골프의 판도를 바꾼 '기술 혁신가'이자 '스타 플레이어'로서 현대 골프의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다. 당시의 골프는 주로 신중한 플레이와 예측 가능한 샷이 주를 이루었으나, 영 톰은 이러한 보수적인 틀을 깨고 더욱 공격적이고 창의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선보이며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그의 플레이는 단순히 힘을 과시하는 것을 넘어, 정교한 기술과 대담한 전략이 결합된 예술에 가까웠다.

 

영 톰의 혁신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그의 신체적 특징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 올드 톰 모리스보다 큰 약 173cm(5피트 8인치)의 키에 단단하면서 강인한 체격, 특히 매우 강한 손목을 지녔다. 이러한 체형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강력하고 유연한 스윙 아크를 만들어낼 수 있게 했으며, 이는 그의 파워풀한 드라이브 샷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젊고 건장한 육체는 단순히 공을 때리는 것을 넘어, 공에 다양한 스핀을 걸고 궤적을 조절하는 섬세한 기술을 구현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가 발명하고 대중화시킨 가장 혁신적인 기술 중 하나는 바로 '백스핀(Backspin)'이었다.

 

당시에는 거친 페더리 볼(featherie ball)에서 구타페르차 볼(gutta-percha ball)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고, 영 톰은 이 구타퍼차 볼의 특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했다. 그는 아이언 클럽으로 볼을 쳐서 백스핀을 걸어 그린 위에 공이 떨어졌을 때 앞으로 굴러가지 않고 제자리에 멈추거나 심지어 뒤로 살짝 끌려오는 경이로운 샷을 구사했다. 이는 현대 골프에서 아이언 플레이의 기본 중의 기본으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마법 같은 기술이었다. 거친 링크스 코스와 예측 불가능한 스코틀랜드의 바람 속에서 백스핀 기술은 그가 공을 깃대 가까이 정확하게 붙일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무기가 되었다.

 

또한, 영 톰 모리스는 '드로우(Draw)'와 '페이드(Fade)' 샷의 선구자로도 알려져 있다.

 

드로우는 공이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다 왼쪽으로 살짝 휘어지는 샷이고, 페이드는 반대로 오른쪽으로 살짝 휘어지는 샷이다. 당시 골퍼들은 대개 직선으로 공을 치는 데 집중했지만, 영 톰은 볼에 의도적으로 사이드 스핀을 걸어 샷의 궤적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이는 코스의 지형과 바람의 방향을 영리하게 이용하고, 장애물을 피해 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고도의 전략적 기술이었다. 그의 이러한 샷 메이킹 능력은 골프를 단순히 멀리 치고 퍼팅하는 것을 넘어, 볼의 비행을 조절하는 정교한 과학이자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는 단순한 '드라이브 앤 퍼트'를 넘어선 진정한 '전략적 골프'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영 톰의 압도적인 실력과 이러한 혁신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그를 당대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다.

 

그가 경기에 나설 때마다 구름 떼 같은 엄청난 관중이 몰려들었다는 기록은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사람들은 그의 파워풀한 드라이브와 정교한 아이언 샷,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스핀 컨트롤에 열광했으며, 그의 경기는 마치 연극을 보듯 흥미진진했다. 이러한 인기는 '챌린지 매치'라는 당시의 경기 방식과 맞물려 골프 대중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챌린지 매치는 두 명의 선수나 팀이 서로에게 도전하여 큰 내기를 걸고 승패를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영 톰 모리스는 윌리 파크 시니어(Willie Park Sr.), 뭉고 파크(Mungo Park), 윌리 던(Willie Dunn) 등 당대 최고의 프로 골퍼들과 수많은 챌린지 매치를 벌이며 명성을 쌓았다. 예를 들어, 1869년 올드 톰 모리스와 영 톰 모리스 부자는 프레스트윅에서 윌리 파크 시니어와 데이비드 스트라스(David Strath) 팀을 상대로 100파운드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의 내기 경기를 펼쳤다.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수만 파운드, 한화로 수천만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특히 1870년 영 톰은 윌리 파크 시니어와의 챌린지 매치에서 400파운드의 내기가 걸린 승부를 펼치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슈퍼스타급 위상과 그를 보기 위한 사람들의 뜨거운 열기, 그리고 그의 승리에 베팅하려는 팬들의 열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최고의 스타인 영 톰 모리스가 등장하는 챌린지 매치에는 이처럼 엄청난 액수의 내기 돈이 걸렸고, 이는 경기의 긴장감과 흥미를 극대화했다. 수많은 팬들과 도박사들이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이들이 건 엄청난 판돈은 영 톰의 경기를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닌, 일종의 축제이자 사회적 이벤트로 만들었다. 그의 존재는 골프가 소수 상류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중이 즐기고 열광하는 '관람 스포츠'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 톰 모리스는 단순히 골프를 잘 치는 선수를 넘어, 자신의 기술과 카리스마로 대중을 매료시키고 골프라는 스포츠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슈퍼스타'였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프로필 사진
김대중 기자

포씨유신문 발행인겸 편집인
글로벌캐디원격평생교육원 원장
전, (주)골프앤 대표이사
건국대학교 국제무역학과 박사과정 수료
일본 국립 쓰쿠바대학 경영정책과 석사과정 특별연구생
미국 UC Berkeley Extension 수료
저서: 캐디학개론, 캐디가 알아야 할 모든 것, 골프 이 정도는 알고 치자, 인터넷 마케팅 길라잡이, 인터넷 창업 길라잡이, 인터넷 무역 길라잡이, 인터넷 무역 실무, 386세대의 인터넷 막판 뒤집기, 386세대여 인터넷으로 몸 값을 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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