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0년 윌리 파크 시니어의 이름이 골프 역사에 영원히 각인된다. 그가 '골프의 아버지' 올드 톰 모리스와의 치열한 라이벌 구도 속에서 제1회 디 오픈 챔피언십의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기 때문이다.
당시 골프계는 두 사람의 자존심을 건 챌린지 매치(Challenge Match)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매치들은 단순한 시합이 아니라, 한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이 걸린 거대한 드라마였다. 파크 가문의 홈 코스인 머셀버러와 모리스 가문의 세인트 앤드류스를 오가며 펼쳐진 이 매치들은 당대 최고의 흥행 카드였으며, '도박'이라는 흥미로운 요소와 함께 수많은 관중을 몰고 다니며 골프를 소수의 귀족 스포츠에서 대중적인 관람 스포츠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대결은 단순한 기량 경쟁을 넘어, 플레이 스타일과 골프 철학의 충돌이었다. 파크는 모리스보다 훨씬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는 장거리 드라이브와 과감한 퍼팅을 즐겨했고, 이는 안정적이고 정교한 플레이를 선호했던 모리스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팬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했다.
1860년 10월 17일, 프레스트윅에서 열린 제1회 디 오픈 챔피언십은 골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다. 이 대회는 당시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프로 골퍼 8명이 참가하여 챌린지 벨트(Challenge Belt)를 걸고 승부를 겨루는 자리였다. 36홀 스트로크 플레이 방식으로 진행된 이 대회에서, 윌리 파크는 마지막까지 올드 톰 모리스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당시 모리스는 이미 세인트 앤드류스의 전설적인 인물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우승을 점쳤다. 하지만 윌리 파크는 36홀 경기에서 올드 톰 모리스를 2타 차로 꺾고 역사의 첫 챔피언으로 이름을 올리는 이변을 일으켰다. 이 승리는 단순한 개인의 영광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는 골프의 역사를 새롭게 쓴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골프계의 패권을 모리스 가문과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린 파크 가문의 위대한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챌린지 벨트는 붉은 가죽과 은장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당시 골퍼들에게는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트로피는 없었다.
윌리 파크 시니어는 초대 챔피언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이후에도 1863년, 1866년, 그리고 1875년에 디 오픈 우승을 기록하며 총 4회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1866년 프레스트윅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자신의 우승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1875년 우승은 그의 마지막 메이저 우승이었으며, 이미 40대가 된 나이에도 젊은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 대회는 특히 영 톰 모리스의 죽음과 맞물려 더욱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의 챔피언 타이틀은 단순한 승리를 넘어, 파크 가문이 골프계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가문임을 증명하는 상징이었다. 그의 공격적인 플레이와 끊임없는 도전 정신은 오늘날의 골프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전설로 남아있다. 그는 골프를 정교함과 우아함으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골프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짜릿할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퍼팅은 경기의 흐름을 한순간에 바꾸는 마법이었으며, 이는 훗날 수많은 젊은 골퍼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3부 돌아온 챔피언, 뭉고 파크의 놀라운 데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