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시험장의 하나로 아무런 대과 없이 엊그제 막 대입 수능을 치렀다. 순조롭게 별 탈 없이 지나가야 본전이다. 이 본전을 위해 온 학교 교직원들이 각자 맡은 일을 하느라 분주했다. 행사가 깔끔하게 잘 마무리되었다며 교육청에서 반색했다고 한다. 매년 이렇게 홍역을 한 차례씩 거치면서도 치를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마치 오래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를 정리하듯 학교는 1년 단위로 모든 과정이 포맷되므로 최근 몇 년 전의 일도 굉장히 오래된 일로 느껴진다. 수능 당일 수험생들에게는 수험 환경이 매우 중요할 텐데 아마도 책걸상은 거의 절대적일 것이다. 늘 수험 장소로 쓰이기도 하지만, 현재 3학년을 제외한 두 개 학년은 불과 3년 전부터 새로 도입한 책걸상을 쓰고 있다. 이 제품은 부품의 상당 부분에 플라스틱 소재가 사용되어 가벼운 데다 책상다리 앞쪽에는 바퀴가 달려있어 이동하기 쉽다. 게다가 좁은 공간에 책상을 접어서 보관할 수도 있다. 과거 제품의 결정을 앞두고 모둠 활동에 최적화되었다는 장점을 이유로 모든 학년 부장과 일부 교사들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교장은 결재자 권한으로 밀어붙여 이 제품을 선택하였다. 사실 고등학생들에게 매시간 모둠 활동이 필요
1386년 12월 29일, 중무장한 채 말에 올라탄 두 기사가 파리 수도원 바깥의 결투장에서 마주 보고 있다. 이들은 각자가 주장하는 명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참이다. 재판장인 찰스 6세와 다른 왕궁 신하들을 포함한 열렬한 관중들이 희대의 구경거리를 지켜보고 있다. 고소인은 장 드 카루주(Jean de Carouges)로, 대대로 저명한 노르만 가문 출신의 기사였다. 피고인은 지체는 낮아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인 자크 르그리(Jacques Le Gris)로, 카루즈의 아내 마르그리트(Marguerite)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구도 자체는 매우 간단해서 ‘파경으로 치닫는 두 절친의 우정’이라는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겠다. 르그리가 뛰어난 수완으로 카루주보다 훨씬 더 빨리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재산을 불렸던 반면, 카루주는 자신의 부를 증식하려 애썼음에도 실패를 맛보게 된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커지고 카루즈의 아내가 르그리가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고발할 때까지 그들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는다. 결국, 이들은 결투로 이어지는 모든 법적 조처를 강구하기
서평에 앞서, 먼저 이 땅의 수많은 이명 증상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들이 겪고 있을 고통을 함께하는 심정임을 밝힌다. 필자는 2019년 연말쯤부터 귀에서 매미가 우는 듯한 고음의 금속성 ‘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활동하던 드럼 동호회에서 송년 모임으로 7080 카페를 찾았는데, 마침 빈자리가 없어 대형 스피커 앞자리에 앉아야 했다. 평소 마이크를 붙잡고 악쓰는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그곳은 그런 사람들로 넘쳐났다. 바로 뒤편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고막을 테러하는 순간, 이명의 스위치가 켜지더니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증상의 여파로 다른 사람들의 발음이 자주 헷갈리게 들려서 의사소통이 불편해지고,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며, 무엇보다 하루에도 두세 차례 코까지 골며 잠시 눈을 붙여야 할 만큼 신체의 피로도가 급증했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순간만큼은 이 증상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좀 무모한 일도 시도하였다. 그렇게 해서 이룬 업적(?)이 바로 연간 100편의 서평 쓰기였다. 최근에는 고음만 들리던 증상에 이어 저음의 울림까지 추가되어 고맙게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새로이 들리기 시작했다. 귀에서 딸랑거리는
이 책은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다마지오가 의식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출발한 그의 연구 결과를 설명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란 유기체의 생명을 이어가는데 필요한 조건인 항상성을 보장하기 위해 진화한, 일련의 발달에 기초한다고 말한다. 항상성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처럼 가장 단순한 생명체에도 적용되며, 의식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이 약간 생소하고 언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데카르트의 오류’, ‘스피노자의 뇌’, ‘사물의 이상한 순서’ 등 그의 전작들을 마저 읽어본다면 대부분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책이 그의 전작들에서 이미 언급된 것들의 요약에 가깝고 내용이 덜 상세하며 제공되는 정보와 사례도 적은 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느낌은 마음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 그 마음이 속한 유기체 내부의 생명 상태를 알려준다. 또한 느낌은 그 마음이 느낌의 메시지에 담긴 긍정적 또는 부정적 신호에 따라 행동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느낌의 기능. 119쪽)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인간의 마음을 일컫는 다른 이름, 즉 ‘의식’과 그 진화이다. 그는 개미와 벌에게 일종의 의식을 부여하고, ‘비인간을 멸
이 책은 주로 부산 지역에 기반을 둔 열두 명의 생명과학 전문가들이 2008년 12월 ‘탐독사행’이라는 책 읽는 모임을 결성하고, 도서의 특정 분야나 주도적인 진행자 없이 자율적으로 참여하여 각자 읽은 책의 서평을 엮어 한 권의 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서평 대상은 참가자들이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읽기를 미루었던 일반 교양부터 인문, 사회, 경제, 역사, 예술,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특히 전공 이외의 분야임이 강조되었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은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더 넓고 깊은 사유를 위한 전공 외 독서’에서 비롯된 열두 저자의 다양한 시각과 문체에 있다. 이 12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연의 일치랄까 예수와 최후의 만찬을 함께 했던 그의 제자들처럼 이 책의 저자들 역시 사제관계가 대부분이고, 탐독사행 모임 역시 사제관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전체 3장으로 구성되었으며 1장은 일상과 철학 사이, 2장은 내 마음의 온도, 3장은 더 나은 배움을 위한다는 주제로 서평이 4개씩 엮여있다. 심오한 철학과 역사부터 다채로운 신변잡기에 이르기까지 소재가 다양하여 읽는 재미가 찰지다. 박사 학위를 기본으로 하는 독서 모임
신성한 소(Sacred Cow) (특히 부당하게) 그 어떤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생각, 관습, 제도 -옥스퍼드 영어사전 우리나라는 최근 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하여 유례없이 단기간에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국가로서의 자부심을 맛보고 있다. 초근목피와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조부모 세대와는 딴판으로 선진국 수준에 어울리는 육류 소비량 덕택에 젊은 세대의 신장과 체격은 확실히 좋아졌다. 배고프던 과거와는 달리 육식 소비량이 너무 많으니 줄여야 한다, 또는 육식을 끊고 완전한 채식을 해야 건강하다는 둥 요즘은 잘 먹는 것보다 살찌기 쉬운 음식을 먹지 않고 버티기가 더 어려운 지경이다. 이제는 육식에 대한 영양, 환경 그리고 윤리적 차원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요구받기에 이르렀다. 끼니 대신 과체중을 걱정하는 데 불과 70년 사이라니, 이만한 격세지감도 없지 싶다. 영양학자이자 저자인 다이애나 로저스는 유기농 채소 농장에서 가축을 키우고 있으며, 공저자인 롭 울프는 베스트셀러 ‘The Paleo Solution’의 작가이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육식, 특히 소고기 문제에 대한 영양, 환경, 윤리의 세 가지 쟁점을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 4부에서는 이 문제에 대
기술만능주의가 되어버린 21세기는 사람들 사이의 공감, 엄밀히 말하자면 감정이입이 부족한 시대가 되었다. 자신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는 어려워도 미워하기는 아주 쉬운 법이다. 인구수가 폭증하는 속도 만큼이나 인간의 존엄성이 떨어지고 공동체 역시 무너졌기 때문일까? 1970년대에 비해 확실히 우리는 주위에 훨씬 덜 신경 쓰며 산다. 2009년 현재 보통 사람들의 평균적인 공감 능력은 1979년의 75%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2006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이 ‘공감 적자’로 고통받고 있음을 언급하였듯, 코로나바이러스 발발 이후 미국의 전반적인 상황은 더욱 나빠진 것 같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글쎄, 정말 무슨 방법이 없단 말인가. 저자는 개인과 집단이 이 추세를 뒤집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을 계속해서 되짚어 본다. 여기에는 전직 백인 우월주의자가 포함되는데, 그는 아버지가 된 후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면서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버리게 되었다.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함께 그는 ‘한 때 그가 살았던 어둠의 세계에서 사람들을 추출하는 일’이라 부르던 비영리 지원 단체를 결성하였다. 또한, 대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오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돌아보면 우리 인류는 항상 기술의 발전으로 일자리가 없어질 것을 걱정해왔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제조업자들이 앞다투어 기계를 도입해 대량생산을 시작하자, 자동화로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운 사람들이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어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실제 미국 뉴욕의 거리를 메우고 다니던 마차와 말들은 대량생산된 포드 차량으로 대체되었다. 신기술로 인해 또 다른 새로운 산업이 나타나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번엔 다르다면서 곧 큰 재앙이 도래할 것처럼 우려한다. 최근 IT 기술의 발달로 등장한 인공 지능이라는 신기술은 인류의 새로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과연 우리 인간의 일자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체계적으로 분석하면서, 먼저 그간 인간의 노동이 기계의 자동화에 잠식됐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노동에 대한 수요는 계속 존재하였고 왜 일자리 부족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한다. 자동화의 초창기에는 인간이 밀려나지만 다른 영역에서 보완 작용이 일어나 걱정과는 다르게 노동의 수요가 증가하였
1853년 미국 해군 증기선 함대가 도쿄 근해에 나타나면서 일본의 모든 것이 변했다. 대외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최강대국 청나라가 아편전쟁 이후 내부분열로 흔들리고 종이호랑이로 전락하자 에도 막부는 혹시 있을지 모를 서구의 침략에 긴장한 상태였다. 미국의 요구사항은 ‘미일수호통상조약’으로 침략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개항 약속이나 외국인 신분 보장 등 민감한 사안이 대두되었다. 에도 막부는 서양과 통상조약을 맺으려 했다. 막부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실무진이라면 최종 결정은 천황의 몫이었기 때문에 막부는 교토 황궁의 재가를 기다렸다. 그런데 당시 고메이 천황이 서구인이 싫다며 수결을 미뤘고 천황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막부는 천황을 제치고 조약에 서명하고 만다. 미군 함대는 속절없이 돌아가고 일본 국내 여론은 들끓었다. 외적을 막아야 할 막부가 굴욕 외교를 했다며 강경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막부의 신분제에 복종하던 하급 무사들에게 물가 상승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하자 울분에 찬 탈번이 잇달았다. 오랜 세월 전쟁 없이 평화롭던 일본 열도에 닥친 외세 침략의 공포감은 특히 급격한 사회변화로 손해를 보게 된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마라, 일본놈 잊지 말고 되놈(중국) 되(다시) 나온다, 조선사람, 조심하자’ 이 책을 읽고 나니 우리나라 해방 이후 혼란하던 정국에 유행했다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나라 이름에 자연스레 이어지는 동사와 두운(頭韻)이 기막히게 어울린다. 가사의 핵심은 결국 외세의 위협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립 자강을 이루자는 데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이 와중에도 계란판 원자재 생산으로 국내 판매 부수 1위라는 모 신문사의 기사에서는 쉼표 하나를 없애 ‘조선사람들이여, 그러니 이제 조심합시다.’라는 의미를 마치 제삼자가 말하는 양 ‘조선사람을 경계하자’로 오도하고 있다. ‘일본놈 일어난다’라고 가사를 고치는 참으로 꼼꼼하고 정갈한 수법으로 이웃 섬나라의 대변지 역할에 충실하니 그들의 눈물이 나는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각설하고, 어릴 적 세계에 우리나라를 둘러싼 여러 이웃 국가들이 있으며 좋든 싫든 그들로부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 이래로 우리는 왜 늘 ‘선진국’ 따라잡기와 흉내 내기에 바빴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세계 음악계를 주도하는 BTS와 수준급 코로나 방역 덕택에 우리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