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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레저

[유선종 엣지리뷰 46] 지정학의 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족쇄인가 열쇠인가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마라,

일본놈 잊지 말고 되놈(중국) 되(다시) 나온다,

조선사람, 조심하자’

이 책을 읽고 나니 우리나라 해방 이후 혼란하던 정국에 유행했다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나라 이름에 자연스레 이어지는 동사와 두운(頭韻)이 기막히게 어울린다. 가사의 핵심은 결국 외세의 위협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립 자강을 이루자는 데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이 와중에도 계란판 원자재 생산으로 국내 판매 부수 1위라는 모 신문사의 기사에서는 쉼표 하나를 없애 ‘조선사람들이여, 그러니 이제 조심합시다.’라는 의미를 마치 제삼자가 말하는 양 ‘조선사람을 경계하자’로 오도하고 있다. ‘일본놈 일어난다’라고 가사를 고치는 참으로 꼼꼼하고 정갈한 수법으로 이웃 섬나라의 대변지 역할에 충실하니 그들의 눈물이 나는 노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각설하고, 어릴 적 세계에 우리나라를 둘러싼 여러 이웃 국가들이 있으며 좋든 싫든 그들로부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 이래로 우리는 왜 늘 ‘선진국’ 따라잡기와 흉내 내기에 바빴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세계 음악계를 주도하는 BTS와 수준급 코로나 방역 덕택에 우리가 바로 선진국임을 체감하는 요즘이다. 문화 대국으로서 국뽕 차오르는 희열감을 애써 감추자니 좀 아쉽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가 겪어야 했던 격동의 근현대사가 사실은 민주-공산 이념의 대립이 아닌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에 기인함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책은 지정학 정립에 이바지한 이론가와 전략가를 소개하면서 국가적 관점의 지정학 역사를 짚어본다. 이들이 주장하는 지정학은 자국의 이익 관철에 몰입한 이론적 배경이며 평화로운 공존 따위와는 거리가 먼 ‘보이지 않는 무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책의 부제인 시파워(Sea Power), 랜드파워(Land Power)는 지정학 용어로 보이는데, 마땅한 해석이 없는지 저자는 이를 외래어 고유명사처럼 사용한다. 저자는 고전 지정학자 4인을 필두로 그들의 지론을 이어받은 유력 정계 인사들의 행적을 연이어 소개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미국의 알프레드 마한은 해상을 제패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의 위상을 분석한 1890년대 두 권의 저서로 일약 유명인사가 된다. 그의 책은 식민지 확장과 제국주의 경쟁 시대를 맞아 미국의 군비 확장론자들에 강력한 영감을 선사한다. 훗날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해군력을 확장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키워 마한의 전략을 실현하였으며 이어 세계 2차대전의 추축국인 독일과 일본에도 영토확장의 야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영국의 헬퍼드 매킨더는 드넓은 영토를 지닌 러시아가 철도망으로 내륙을 촘촘히 연결하는 것을 보고 지배적인 육상력은 곧 지배적인 해상력으로 발전될 것을 예견한다. 유라시아 북부와 중앙을 세계 정치의 중심으로 간주한 그는 소련이 전쟁에 이기면 지구 최대의 육상력 지배자가 될 것을 우려했는데 이는 2차대전 후 시작된 냉전체제에서 소련 봉쇄의 정당성을 제공한다.

독일의 카를 하우스호퍼는 과거 독일 땅이면서 독일인의 피가 흐르는 유럽 동쪽을 의미하며 나치즘의 주요 이론적 바탕이 되는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주창하고 옥중의 아돌프 히틀러에게 사사했으나, 그가 러시아와 그 위성국으로 이를 잘못 이해하고 전선을 동서 양쪽으로 확장한 탓에 나치는 몰락하고 만다.

​​

미국의 니콜라스 스파이크먼은 세계 정치의 핵심을 유라시아 대륙 해안지역으로 보고 림랜드(rimland)라 불렀으며 러시아 서쪽, 유럽 대륙, 북아프리카, 중국, 동아시아 등을 포함했다. 2차대전 후 소련 봉쇄정책이 주류일 당시는 매킨더의 이론이 지배적이었으나, 소련의 몰락으로 중국이 부상한 이후 림랜드 지배자가 유라시아에 이어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내다본 그의 이론이 재조명을 받게 된다.

이상 4인의 고전지정학자 이외에도 저자는 미 국방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를 나치와의 연관성으로 한때 용어 사용이 기피 대상이었던 지정학을 부활시킨 인물로 묘사한다. 또한, 일명 ‘그랜드 체스판’을 통해 미국 단일 체제를 분석하여 미국의 새로운 역할을 주문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정통 기독교를 승계한 러시아만이 인류를 구제할 수 있다는 메시아주의로 서양 문명의 지배로부터 세계를 해방하겠다는 러시아의 알렉산더 두긴, 근대 유럽인들에 의한 식민지화의 역사를 밝히고 세계의 모순과 왜곡을 찾아 그 시정 방향을 제시한다면서 지정학을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상전의 도구로 전락시킨 일본의 코마키 사네시게, 균형 잡힌 미중 관계를 구축하기에 유리한 전략적 상호 신뢰를 쌓고자 서진을 주장하며 일대일로 전략을 기초한 중국의 왕지스 등을 소개한다.

 

본디 지정학은 19세기 말 여왕의 나라 대영제국과 차르의 나라 러시아 제국 간 양강대립 시기에 정립된 이래 여러 강국의 영토확장과 자원확보를 위한 국정운영의 초석이 되었다. 이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은 물론 러시아-중앙아시아-동부 유럽 일대를 포함하는 거대한 세계도 중심인 심장지대(Heart Land)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 제국을 건설한다는 개념으로,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북남미 대륙은 주변부에 고립된 거대한 섬으로 치부된다. 대서양과 태평양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는 모양새에 놓이는 미국의 처지에서는 서유럽(독일)과 극동아시아(한국, 일본)에 꽂아놓은 미군을 철수시킬 수 없다. 이들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핵심인 동시에 협공의 위기에 놓인 본토를 방어할 최전선 병력이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은 중국을 경제적 이익과 미국적 가치에 근본적 위협을 가하는 주된 경쟁자로 선언하였다. 중국의 인권유린, 기술 탈취, 군사 팽창, 무역 갈등, 미국 중간선거 개입 의혹, 남중국해 문제, 위구르족 이슬람교도 탄압 등 그 이유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은 유엔인권이사회, 유네스코, 파리기후변화협정에서 탈퇴하고 주요 동맹국들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무역 전쟁을 선포하는 등 일방적 이기주의로 고립을 자처하고 있다. 미군 철수 비용을 부담하라며 영원한 혈맹이라는 한국을 협박하기도 한다. ‘우리가 먼저 세계의 본보기가 되자’라던 미국 우선주의는 ‘우리부터 주도권을 선점하자’로 변질되었다. 트럼프가 선택한 길은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 추구한다며 자국민으로부터 악당 수퍼파워로 비난받는다. 미국의 국제적 지위가 흔들리는 틈을 타 중국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 차이나머니를 뿌려대며 ‘신 조공외교’ 추진에 여념이 없다.

지정학상 중국발 육상력과 미국발 해상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반도는 이미 세계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충돌한 바 있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대립으로 포장된 대리전쟁을 겪기도 했지만 사실 한국은 태생적으로 지정학의 덫을 깔고 앉은 형국이다.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고 지원한 스탈린의 의도는 철저한 지정학적 계산의 결과이며 사회주의 종식을 선언한 러시아에 와서도 이러한 욕구는 변하지 않았다.

남북 분단의 원인이기도 한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동아시아의 강력한 통제력 유지일 뿐, 한반도의 평화가 아니다. 이는 북한의 종전 선언 요구에 응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북한 통일로 북한의 위협이 사라지면 미국의 존재감 역시 사라지고 대신 중국에게 유리한 상황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중국에게 한국은 미국의 전초기지인 셈이고 북한은 중국의 뒤뜰이자 완충지대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는 곧 미중간의 첨예한 갈등 고조를 의미한다. 따라서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도, 전쟁도, 혼란도 원하지 않는다. 동북공정에 이어 한복과 김치가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억지를 부리는 것도 결국은 미국에 대항하는 수단이다.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을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단도’로 생각한다. 한반도가 분열과 혼란으로 일본의 심장을 겨누지 못하도록 약화시키거나 통제하는 것이 곧 그들의 핵심 이익이 된다. 다행히도 해방 이후 살아남은 친일파가 득세하여 정치 경제 교육 기업 등 여러모로 일본의 이익을 도와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러시아에게 북한은 안보 관점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소련 붕괴 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안보 위협이 크지 않으면서 에너지 자원 수출 등 경제적으로 반사 이익을 취할 방법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미국, 중국, 일본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원할 이유가 없다. 우리의 분단 상태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균형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여건에서 한국은 적대적 분단을 해소하고 평화 체제를 정립함으로써 주변 강대국들의 한반도 전략 수립에 근본적인 제약을 주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지정학을 앞세운 전략으로 한반도를 압박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이념적 반목과 역사의 질곡에 갇혀 있는지 질타하면서, 우리에게 최선의 이익은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이를 위해 남북한의 관계를 새로이 할 것을 주장한다. 지금까지 당하고만 살던 약소국 인식에서 벗어나, 오히려 주변 국가들의 향후 행보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 한국의 위상을 새롭게 자리매김할 때다.

 

[골프앤포스트=유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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