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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레저

[유선종 엣지리뷰1] 닥터 셰퍼드 죽은 자들의 의사

실화로 읽는, 스릴러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법의학자의 세계

한 권의 책은 세상을 내다보는 창문과도 같습니다. 창문이 크고 많을수록 세상이 더 잘 보이는 법입니다.

[유선종 엣지리뷰] 코너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과 나 자신을 위해 읽어두면 좋은 책을 소개해 드립니다.

 

 

영국 최고의 법의학자 닥터 셰퍼드

 

40년간 2만 3천구의 시체를 부검하며 사인을 규명하느라 망자들이 몸으로 남겨놓은 이야기를 들어온 이 60대 법의관의 인생 이야기는, 긴장감이 일렁이고 다음 장면이 예측되지 않는 마치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 같다.

저자는 13세 때 당대 유명한 법의관의 저서 심슨 법의학 ‘Simpson’s Forensic Medicine’(3판)을 처음 접한 후, 죽은 상태이긴 했지만 맡은 환자가 있는 법의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이후 의과대를 거쳐 의사로서 경력을 쌓아 유명 법의관이 되고, 학계와 의료계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그의 정신적 스승인 심슨 법의학 12판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법의관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망자의 사인을 어떻게 증언하는가에 따라 법정 싸움의 결과도 첨예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그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법정 상대방, 언론과 검찰 심지어는 협업관계인 경찰로부터도 거의 언제나 낭떠러지 같은 감정의 극한상황에 몰리기 일쑤였다. 대개 감정표현이 서툰 사람에게는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겠지만, 때에 따라 장시간 대량의 시체를 부검하여 사인을 밝혀야 하는 그에게는 오히려 무덤덤한 감정능력 자체가 직업적 전문성을 보장해 준 셈이다. 때로 그는 법정에서 사인을 증언할 때마다 법의학적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보다는 배심원 또는 판사의 판결에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는 상황에 엮일 경우를 더 염려해야 했다.

진실을 찾는 사람이 되기 위해 법의관이 되었다.

 

나는 내가 진실을 찾는 사람이 되기 위해 법의관이 됐음을 상기했다. 그 말은 진실을 왜곡하라는 압력을 받을 때마다 진실의 편에 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략) 진실의 유연성에 대한 힌트는 이미 있었다. 예를 들면 법정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때의 나는 명명백백한 도덕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여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120쪽)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겪어야만 하는 고민과 갈등 역시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난다.

부검을 할 때 나는 문명사회가 기대하는 ‘최고의 예우’를 갖출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까지 담아 신속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작업한다. 나는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려 이 일을 하는데도 수상하고 잔인한 백정으로 오해받는 게 너무나 괴롭다.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가족의 죽음에 대해 직접 나의 설명을 듣거나 법정에서 나의 증언을 듣는 사람들이 내가 세심하게 배려하며 그 일을 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일한다는 것도. (187쪽)

특히 주말 아침 경찰로부터의 호출 전화를 비롯한 과중한 업무량과 감당하기 힘든 감정소진에 이어 그는 또 한 가정의 가장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역할을 해내야 했다. 그런데도 가정에 충실해지려 노력하는 모습에서 적어도 나와 같은 중년 남성들의 전폭적인 공감을 얻게 되리라 생각한다. 첫 결혼의 배우자와 백년해로는 아니었지만 결국 새로운 인생을 택하게 되었으니 그 또한 자연스러운 선택이라 보인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 모습인가.

이런 생활에 어떻게 사랑을 끼워 넣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중략) 게다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한담? (중략) 어떻게 하면 자상함과 유머와 이런 애정표현이 결혼생활에 깃들 수 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200쪽)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공황장애 판정

 

최근 2016년 그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중대 살인사건의 증인으로서 온몸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자신도 모르게 외상후스트레스장애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와 공황장애 판정을 받았으나, 인류의 공익에 이바지한다는 자긍심과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올곧은 신념으로 다시 일어선다.

사족으로 이 책의 원제는 Natural Causes 인데 웬만한 추리소설보다 더 흡입력이 있고 번역이 매끄럽다. 법의학이라는 궁금했지만 잘 모르던 세계를 잘 묘사하고 있어서 원서를 곁에 두고 병행 독서를 해 보고픈 욕구가 일어날 정도다. 또한 영유아돌연사(SIDS, Sudden Infant Death Syndrome), 병리학자(pathologist) 등 대중에게 알려진 비교적 친숙한 의학, 해부학 용어를 접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법의관이 아니라 전문 작가가 저술했다고 하여도 믿을만한 수준급 문장력과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460쪽 분량을 흥미진진하게 단시간 내에 읽어나가는 재미를 만끽하시라 권해드린다.

 

[골프앤포스트=유선종 컬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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