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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레저

[유선종 엣지리뷰27]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

미국은 과연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인가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실크 스타킹을 가질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가난한 여공도 그 스타킹을 신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의 대표적인 이론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대중의 삶을 향상하는 자본주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류 역사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가장 큰 번영을 이룬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미국인들은 황무지에서 400년 만에 세계 최고의 부를 일궜다. 오늘날 미국은 자국 통화를 기준으로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국민의 생활 수준 역시 노르웨이, 카타르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때 각국에서 이민자들이 ‘기회의 땅’ 미국으로 몰려든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이 이처럼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번영을 이룬 요인은 무엇일까. 이 해묵은 질문에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과 이코노미스트 저널리스트 에이드리언 울드리지가 쓴 이 책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에서는 ‘창조적 파괴’라는 답을 내놓았다. 창조적 파괴란 슘페터가 1940년대 자신의 저서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생산성 향상 과정을 의미한다. 미국은 전통산업의 파괴가 창조의 대가임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번영했다는 논리다.

 

이 책은 미국이 유럽 국가들처럼 가진 것을 지키려는 ‘성채의 나라’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다니는 ‘캐러밴과 같은 나라’라고 규정한다.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창조적 파괴’가 지닌 ‘창조’와 ‘파괴’적 속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창업자들이 기업을 설립하고 사업 규모를 키우는데 뛰어난 동시에 경쟁력을 잃은 기업이 파산했을 때 정리하는 것도 자유로운 국가가 바로 미국이다. 19세기 미국의 주요 기업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러 번 사업에 실패한 뒤에야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석유왕’ 존 록펠러, ‘자동차 왕’ 헨리 포드 같은 이들이 모두 숱한 실패를 딛고 세계적인 기업을 일궈냈다.

 

역사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한 미국은 건국 초기 재산권을 엄격하게 보호하고 국민이 소득을 지킬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창업 정신을 촉진해 왔다. 해외 투자자들이 안전하게 미국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그 어떤 국가들보다 적극적이었다. 재산권은 특허권 보호로 확대됐고, 이는 기업가들에게 혁신을 전파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남북전쟁을 치른 미국은 대륙 전체에 걸쳐 기업을 토대로 삼는 상업 공화국으로 단일화됐다. 이후 19세기 후반 들어서는 문화, 인구, 정치, 지리 등의 다양한 이점을 통합해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창업자들처럼 미국도 강대국이 되기까지 숱한 실패를 겪어야 했다. 1930년대 미국은 역사상 가장 길고 깊은 불황에 시달렸다. 1970년대에는 경제불황 와중에 물가가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렸으며, 미국 기업들은 전후 독일,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 상처를 입기도 했다. 현재 미국은 다시 한번 유례없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생산성 증가율이 거의 정체돼 여러 산업 분야에서 중국을 비롯한 신흥 강대국에 밀려나고 있다. 신생 기업 수는 저점에 이르렀고, 노동시장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으며, 기업 활동을 막는 규제도 급증하고 있다.

 

이 책은 미국 경제가 이 같은 국면을 맞게 된 요인으로 '쇠퇴하는 역동성'을 꼽는다.

 

역동성을 가로막는 최대 요인은 비대해진 복지제도다. 현재 미국 가정의 55%는 연방 복지제도를 통해 현금이나 현물 지원을 받으며, 65세 이상은 사회보장연금과 메디케어 혜택을 받는다. 58%의 아동이 복지 혜택을 받는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전체 미국 인구의 36%인 1억2,000만 명은 2가지 이상의 복지 혜택을 누리고 산다. 이외에도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과도한 규제와 미국으로의 ‘자본 환류(Capital Repatriation)’를 위해 세금을 삭감하고 인프라 지출을 늘리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도 미국의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목했다.

저자들은 미국 경제가 처한 문제는 본질적으로 빠져나오기 어려운 늪이라기보다 열쇠만 있으면 벗을 수 있는 ‘족쇄’라고 말하면서 정치권에 이러한 족쇄를 풀어줄 정치적 의지를 촉구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보다 미국이 스스로 만든 족쇄를 차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미국이 족쇄를 벗는데 필요한 모든 열쇠를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미국에 그 열쇠를 돌릴 정치적 의지가 있느냐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미국 자본가들의 관점에서 이 책을 소개하자면, 전설적인 연준 위원장부터 누구나 알만한 이코노미스트 잡지 편집자 겸 역사가에 이르기까지, 다 떨어져 기워입던 식민지 시대의 누더기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부와 혁신의 성장 동력에 이르는 미국 자본의 발전상을 노래한 대서사시라 칭할 만하다. 이 책은 2018년 파이낸셜 타임스와 맥킨지 비즈니스 북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참고로 맥킨지 비즈니스 어워드는 실용적이고 획기적인 경영이론을 표창하기 위해 1959년에 제정되었으며, 해마다 경영계와 학계의 저명한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외부 심사위원단이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린 뛰어난 기사를 선정하여 수여한다. 

 

전설적인 경력을 시작으로 저자는 미국 경제의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까지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너머까지 알고 싶어 하는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의 소유자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유기체처럼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미국 경제를 이해하는 교과서적 방법론을 정립한 그는 특히 혁신의 난제인 생산성 성장에 관한 질문, 즉 ‘혁신은 어디서 시작되며 사회 전반에 확산시킬 방법은 무엇일까?’, ‘보다 민주적으로 퍼진 혁신의 열매를 거두는 시기가 있던 반면 지금 같은 시기는 왜 그렇지 못한가?’와 같은 질문의 해답을 깊이 연구하였다. 

 

저자가 평생에 걸쳐 씨름을 벌여왔던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지난 역사의 과정에 미국 경제를 움직여 온 결정적 동력이라는 핵심어로 압축된다. 이코노미스트 기자이며 역사가인 에이드리안 울드리지와의 협업으로 저자는 광활한 풍경, 내로라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업적, 성공적인 돌파구, 계몽적 사상과 형편없는 도덕적 실패담 등이 포함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그 안에는 남북전쟁 이전 남부지역 경제의 기반이었던 노예 역할부터 루스벨트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뉴딜 정책의 실제로는 미미했던 성과와 자유무역 개방을 위해 전혀 자유롭지 못했던 미국 정부의 강압적 영향력 행사에 이르는 모든 중요한 논란거리도 들어있다. 자본 축적을 위해 악용되었던 노예제도, 원주민 학대와 이주민 착취 등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간 자본주의의 추악한 이면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인정하게 되는 분명한 사실은 미국을 유례없이 강력하고 융성한 국가로 만든 원동력은 수백만 평범한 미국인들이 뿜어낸 비범한 생산적 에너지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사실 저자가 주장하는 가장 큰 미국적 특징은 창조적 파괴와 그 결과에 대한 독특한 관용에 있다. 예전의 문물은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생각에 따라 끊임없이 동요하며 새 문물에 길을 내어주는 것이다. 때로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지만, 이 창조적 파괴는 거의 모든 미국인을 불과 몇 세대 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시민들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생활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정의감과 인간 존엄성이 변화의 고통을 정면으로 맞이하는 선구자들을 보호할 수 있어야 마땅하겠지만, 미국인들은 언제나 이득에는 수고가 따름을 수용하였으며 이러한 유산의 인식이 있어야만 그들이 맞섰던 도전이나 자랑해마지않던 국운 상승이 퇴색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 미국의 생산성 성장은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며 다시금 정체기를 맞이하고 있다. 과연 미국은 빅 브러더로 불리던 세계적 주도권을 지속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칭 미국보다 덜 민주적인(?!) 국가들에게 어쩔 수 없이 주도권을 양보할 것인가? 미국이 당면한 가장 절박한 이 질문에 역사의 교훈을 적용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기는 다시 없어 보인다.

 

[골프앤포스트=유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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