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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종 엣지리뷰 60] 신화의 종말

미국도 예외일 수 없는 국경 분쟁의 진실

 

1932년 연설에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는 샌프란시스코 청중에게 미국은 초창기부터 여타 나라들과는 항상 달랐으며 특별한 국가임을 강조하였다. 이미 오래전 개척지에서 출발하여 서해안에 도달한 개척자들의 후예로서 그는 아마도 남다른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앞서 서부 개척의 논제를 최초로 명료하게 밝힌 사람은 위스콘신 대학의 역사학자 프레더릭 잭슨 터너였다. 1893년, 그는 지친 청중들에게 미국 역사상 국경의 중요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질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빠르게 깨어났다. 터너는 미국이 지리적 행운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표면적으로 무한한 확장이 가능해 보이던 서구는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좁은 공간에 갇힐 때마다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해주곤 했다.

 

국경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사람들에게 평화롭게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준 동시에 가난, 불평등, 극단주의를 포함한 다른 사회적 문제들도 함께 희석해주었다. 내부의 정치적 문제를 외교적 돌파구로 해결하는 구대륙의 제국주의적 행태가 신대륙에서도 여전히 반복된 것이다. 터너는 국경이야말로 미국이라는 나라에 젊은 활력을 되찾아주는 마법의 샘이라고 선언했다.

 

저자는 당시의 이런 배경을 더 깊고 풍부하게 묘사해준다. 터너는 국경을 초원의 잡초처럼 땅에서 개인주의가 싹트는 곳으로 묘사했지만, 저자는 이와 반대로 국가가 국경보다 한발 앞서 있던 현실을 지적한다. 정착민들이 개척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부가 먼저 땅을 확보한 후 측량하여 도로를 건설했으며, 그 과정에서 미국 군대는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피를 뿌리며 미국 원주민과 멕시코인들을 삶의 터전에서 제거해 나갔다. 미국은 단연코 비길 데 없는 자유를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였다. 국경 신화의 최고 매력은 ‘여기, 지금’의 골칫거리를 국경 너머로 옮길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국경 너머로 팽창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고, 모두가 승자가 되어 지구의 부를 공유할 수 있는 무한한 세계가 약속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국경은 신기루였으며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는 흔한 미국인들의 자긍심은 역설적이게도 과거 역사에 발목을 잡히고 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애써왔다. 북미 대륙 도처에 피를 뿌리며 그들이 질주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상상했다. 두려움 없이 더 대담하고 자유로운 미래로 달려가고 싶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선조들이 자초한 궁지에 몰렸다.

 

국경확장과 남북전쟁의 양상이 전 세계로 넓어졌을 뿐 미국은 여전히 똑같은 전쟁을 치르고, 똑같은 학살을 반복하며, 수많은 전쟁 과부들이 똑같은 눈물을 흘려야 할 운명이다. 그런데도 귀신에 홀린 듯 총기 판매와 소지를 합법화하고 아이들의 손에 총을 들려주며 기뻐하고 있다. 점점 규모와 빈도가 커지는 학교 총격사건, 끝없는 해외 파병과 전쟁,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와 대규모 노숙자 캠프,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 시스템과 가장 많은 재소자 등, 점점 더 번잡해지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과 멕시코를 분리하는 상상 속의 선에 집착하였다. 그는 정치적 경계를 실제 물리적 장벽으로 바꾸고 싶었으며 실제로 의회가 그의 장벽에 자금을 대주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연방정부를 폐쇄하기도 했다.

 

그의 ‘아름다운 벽’은 국가의 다른 모든 기능보다 그와 그를 숭배하는 제삼자들에게 더 큰 의미를 지녔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지 2년이 넘도록 미국 언론은 여전히 트럼프 주의를 부추기는 맹목적인 분노로 혼란스러웠다.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신화는 다름 아닌 국경 그 자체다. 모든 나라가 국경을 가지고 있지만, 미국의 국경은 항상 변화하며 새로움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미국 역사에서 국경은 계속 확장되는 경계였다. 처음에는 앨러게니 산맥 서쪽의 내륙을 가리켰고, 그 다음에는 미시시피강 서쪽, 그다음에는 로키산맥 서쪽을 가리켰다. 지리적 개념의 국경이 추상적으로 바뀌어 끝없는 경제 성장을 의미하면서, 국경은 본토를 벗어난 미국 은행과 항공모함, 미군 군사기지 등 끊임없이 확장되는 전초기지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자는 국경이 집단 학살과 폭력이 자행되던 지역이었음을 분명히 지적한다.

 

초기 정착민들에게 미국은 실제 거주지만큼이나 정신적인 열망의 대상이었다. 이 땅의 명백한 경계는 그들에게 부활과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마침내 그들은 동쪽 끝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에서 서쪽 끝의 태평양 연안에 도달하였다. 훗날 ‘건국의 아버지’로 신화가 된 이들에게 정복, 즉 ‘백인 정착민들이 원하는 땅을 점령할 수 있는 권리’는 처음부터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미국적인 의미에서 자유란 국경 너머 무한한 땅을 차지할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쯤에서 톰 크루즈가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서부 개척시대 영화 ‘Far and Away’가 떠오른다. 1889년 당시 미국 정부는 개발 제한 구역으로 지정한 땅을 주민들에게 개방, 미리 나눠놓은 구획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에게 집을 짓고 살 권리를 주었는데 이 제도는 일명 ‘랜드 러쉬(land rush) 또는 랜드 런(land run)’이라 불린다. 본래 그 땅은 토지 소유의 개념이 없었던 인디언들의 삶터였으며 학살과 폭력으로 원주민을 강제이주시켜 비워낸 곳이었다.

​영리하게도 미국 정부는 계급 갈등을 국경 밖으로 분산시키고 계급의 분노를 인종에 투영시킴으로써 회피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여러모로 편리했다. 부유층과 무산계급 사이의 사회적 모순, 즉 인간이 소유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갈등을 국경 너머 서쪽으로 밀어냄으로써 해소할 수 있었다. 신생 국가의 인구가 늘거나 사회적 갈등이 긴장하기 시작할 때면 언제든 서쪽으로 구역을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48년, 유럽의 노동자들이 시민혁명을 겪는 동안에도 미국은 국가적 내홍을 겪는 대신 멕시코 영토의 절반을 합병할 수 있었다. 멕시코인들은 미국의 잔혹함에 익숙해졌으며 지속적이고 끝없는 팽창과 그에 따라 정부를 조직하는 능력에 익숙해진 나라가 자신들을 흡수했다고 기록한다. 이후 테디 루스벨트나 우드로 윌슨 같은 진보 정치인들은 제국에 적합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했다. 국경은 폐쇄되지 않았지만, 대양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이동했다. 이 시기 미국 국내에서는 무관심한 인종 테러가 빈번했는데, 남부 국경을 따라 퍼져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멕시코계 미국인들에 대한 린치 사건이 해외에서의 비일상적이고 말살적인 폭력과 일치했다. 쿠바, 아이티, 필리핀, 도미니카 공화국, 니카라과의 미국 점령지에서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 대다수 백인 미국인들에게 이것은 불협화음의 어떠한 원인도 될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은 터너의 변형 마법이 통하지 않는 곳, 즉 인종차별과 잔인성의 보고가 되었다. 최초의 실제 울타리는 1945년 일본계 미국인들을 위한 전시 수용소에서 용도 변경된 기둥과 철조망으로 세워졌다. 1990년대에 세워진 국경장벽의 연장은 베트남군이 폐기한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건설되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폭력은 계속해서 소용돌이치며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오는데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다.

 

물리적으로 국경을 팽창시킬 수 없게 된 오늘날의 미국에게 한국과 독일, 일본 등지의 해외 파병기지, 핵 잠수함과 항공모함, 미국 자본의 첨병인 은행과 금융기관, 심지어 미국산 프랜차이즈 지점 등은 새로운 국경의 개념이 되고 있다.

무한 확장의 자유와 이상향의 대상이던 국경은 마침내 폐쇄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오늘날 무기 제조사들과 전쟁광(chicken hawk)처럼 가장 착각에 빠진 사람들만이 끝없이 확대되는 미군의 모험주의를 열망한다. 경제학자나 억만장자가 아닌 이상 국가의 무한성장을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도 더는 자기 소모적이며 극단주의적인 세계관을 강요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책이며, 선견지명이 뚜렷하고, 꼼꼼하며 동시에 비난의 대상이다. 저자의 글은 굳이 알아둘 필요가 있을까 싶은 각 시대의 세밀한 세부 사항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풍부한 학식과 문체의 우아함을 함께 드러낸다. 그는 당대 우익 세력의 숨겨진 조상이 했던 말과 행동을 밝혀내는데 탁월하며, 오랫동안 미국을 괴롭혀온 이상한 질병에 대해 설득력 있는 원인을 제시한다. 그는 오로지 신화의 영향력이 약해진 것뿐이며 많은 미국인이 아픈지도 모르고 지내왔다는 사실을 절묘하게 파헤치고 있다. 신화의 종말에 당도하여 더는 갈등을 저 국경 너머로 몰아낼 수 없게 된 미국이 과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어떤 자세를 갖출 것인지 궁금한 독자에게 일독을 권해드린다.

 

[골프앤포스트=유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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