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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레저

[유선종 엣지리뷰 45] 재능의 불시착

이 시대 모든 직장인을 위로하는 소설

 

1. 구직의 추억

 

1990년대 유명 일간지에 실리던 구인광고는 대개 구직자에게 ‘이사주 지참 내사요’를 요구했다. 구직자가 이력서와 사진, 주민등록증을 지참하고 업체로 가서 면접을 보곤 했다. 지명도와 규모를 갖춘 대기업은 별도의 입사 시험을 통해 대졸 신입사원을 선발하였고, 당해연도 주요 대기업의 선발 인원수가 주요 뉴스로 보도되었다. 당시는 대졸자에게 취업이 거의 보장되던 산업화 시대의 끝물이었고, 유명한 모 기업에서는 인사 담당자와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면접 장소에 역술인이 주요 패널로 활약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간 신입사원이 회사에서 잘 버티고 오래도록 살아남는 건 입사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요즘은 고용인이 근로 계약서를 의무적으로 작성하는 시대가 되었다. 부당한 업무나 처우에 항의는커녕 합리적인 의심과 질문조차 허용되지 않던 분위기였는, 정도의 차이일 뿐 아직도 퇴사 의사 따위는 종종 상사에게 개기는 한바탕 소동으로 끝나는구나 싶다.

2. 저자 박소연은 누구?

 

2018년 <지필문학> 신인문학상과 함께 등단한 저자는 국무총리상을 받을 만큼 똑소리 나는 회사형 인간이었다가, <일 잘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합니다> 시리즈를 시작으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쓰고 강연하는 삶을 살고 있다. <재능의 불시착>은 평범한 직장인들의 비범한 감성을 사실감 넘치는 상황 묘사로 그려낸 단편 소설 여덟 편의 대표작 이름이다. ‘막내가 사라졌다’는 그 가운데 약 26쪽가량 되는 첫 단편으로 어느 신입사원의 ‘속 시원한’ 퇴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3. 일인칭 주인공 시점

 

무수한 경쟁을 물리치고 입사하여 과장 직책까지 달게 된 주인공 ‘나’는 코인만 대박 나면 당장 때려치우리라는 다짐을 무려 열네 번이나 생각하면서도 이제는 아무런 감흥 없이 출근하는 직장인이다. 사실 드러내놓고 밝히지만 않을 뿐, 다수의 직장인은 매일 사표를 써서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도 당장 마땅한 다른 방도가 없어 속만 태우는 잠재적 실업 상태에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치사하고 더러운 꼴을 겪으면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을 수없이 되뇌곤 했다. 스스로 원해서 들어온 회사인데 퇴사할 기회만 엿보게 된다니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처럼 여러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입사보다 더 어렵다는 퇴사 앞에 무기력한 인간 군상을 보여줌으로써 평범한 직장인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

 

”회사 다닐 때나 상사고 선배지, 그만두면 아무 관계도 아닐 사람들끼리 진즉 기본 매너는 지키고 살면 좀 좋아요? 지금 여기에 다니고 있으니까 껌뻑 죽는 척 해주는 거지, 나가면 알게 뭐예요? 말도 제대로 안 섞어줄 동네 아저씨고 모르는 아줌마지.“ (20쪽)

 

4. 신입사원의 역습

 

가장 최근에 입사한 막내 강시준은 그의 결근을 확인하고 당황한 동료 직원들에게 자신의 퇴사 업무를 대리인이 처리할 것임을 ‘문자로 통보’한다. 손쉽게 문자로 해고를 통보하는 어떤 갑에 대한 을의 통쾌한 반격으로 시작한다. 그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본부장과 있었던 일 때문인 것 같다. 최초의 여성 임원이자 화끈한 여장부 스타일의 본부장이 부서 회식 날 강시준의 몸을 더듬으며 안겨준 성적 수치심은 남녀의 성만 바뀌었을 뿐, 이 땅의 수많은 여성이 무시로 당해왔던 사례의 하나일 것이다. 제출한 사직서를 팀장이 화를 내면서 찢어버렸다는 민 대리 지인의 얘기는 정당한 권리인 퇴사 의사 표현조차 거부당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마치 영화 ‘하녀’의 주인공인 전도연이 인간성을 짓밟는 자본의 소리 없는 폭력으로 죽을 때 죽더라도 찍소리는 내야겠다며 보란 듯 이를 실행하지만, 사람이 죽었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생일잔치 장면을 보는 듯하다.

 

5. 주변 인물

 

퇴사 이유가 본의든 아니든 그들이 저지른 ‘갑질’ 때문이라 생각한 주변 인물들은 별 비중 없는 막내 사원이 퇴사할 뿐인데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다. 이들을 한 명씩 살펴보자. 우선 연령대도 비슷하고 가장 친하게 지냈다는 민 대리는 강시준이 지방대 출신임을 거론하며 부족한 업무능력으로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소리로 민폐를 끼치며, 퇴사 진행 대리인이 회사로 방문한다는 소리에 전전긍긍하다 병원에 드러눕는 링거 투혼을 발휘한다. 주인공 ‘나’이자 사람은 좋지만 가장 마음 약한 법대 출신 최 과장은 팀원들 앞에서 보고서를 늦게 제출한 강시준의 불찰로 야근하게 되었던 상황을 원망했던 적이 있다. 부서 책임자인 팀장은 업무를 줄여주는 대신 자신의 대학원 과제를 맡긴 주제에 교수들을 잘 상대하지 못했다고 강시준을 나무라고 제출한 사직서마저 받아주지 않는다. 퇴사를 결심하도록 결정타를 날린 본부장의 업적은 앞서 언급하였다.

6. 막내라는 존재

 

막내 강시준은 이 시대를 살아가기 버거운 MZ 세대의 일원이자 20대 직장인을 대표한다. 그 어느 세대보다 많이 공부하여 똑똑하지만 평균적으로 가장 많은 학자금 빚을 져 졸업하자마자 신용불량자가 되기 일쑤이며, 괜찮은 일자리 부족으로 가장 취업이 어렵다는 그 MZ 세대 말이다. 그는 이렇다 할 스펙도 없이 지방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며 큰 키에 호감 가는 체격을 지녔다. 그가 퇴사 대행을 고용한 이유는 본래 퇴사 의사를 알린 후 30일간 업무를 인수인계하도록 법적으로 보장하지만, 사직 의사 자체가 거절되자 정상적인 인수인계 과정을 거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면이 기성 세대에게는 이기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독신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지만 운신의 폭이 넓을 때 과감히 움직여주는 강단은 분명 배울 부분이다.

 

7. 퇴사 대행 서비스 최 이사

 

강시준의 위임을 받아 퇴사 절차 진행을 대신 진행하는 대리인 최진욱 이사는 정상적인 노동법 규범과 집행 절차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최 과장이 그에게 이런 퇴사 서비스 이용자가 또 있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이용자가 급증한다는 답변으로 보아 퇴사가 법에 기대어야 할 부분이 많음을 암시한다.

 

8. 결론

 

비록 저자의 여덟 개 작품 가운데 하나의 단편만 읽었을 뿐이지만, 실제 미니 드라마의 각본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일 만큼 내용이 치밀하고 전개가 빠르고 재미있다. 젊은 세대의 노사관계에 대한 태도와 기업의 세태를 반영하며 우리의 아픈 현실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전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금융 지식과 노사관계 그리고 노동의 가치관을 포함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기성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 신입생들이 졸업 후 맞닥뜨릴 현실에 대비하여 가감 없이 진지한 화두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반드시 그랬으면 좋겠다.

 

[골프앤포스트=유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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