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문화/레저

[유선종 엣지리뷰 47]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일본의 근대화 그리고 우리에게 미친 유신의 뿌리

 

1853년 미국 해군 증기선 함대가 도쿄 근해에 나타나면서 일본의 모든 것이 변했다. 대외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최강대국 청나라가 아편전쟁 이후 내부분열로 흔들리고 종이호랑이로 전락하자 에도 막부는 혹시 있을지 모를 서구의 침략에 긴장한 상태였다. 미국의 요구사항은 ‘미일수호통상조약’으로 침략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개항 약속이나 외국인 신분 보장 등 민감한 사안이 대두되었다.

 

에도 막부는 서양과 통상조약을 맺으려 했다. 막부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실무진이라면 최종 결정은 천황의 몫이었기 때문에 막부는 교토 황궁의 재가를 기다렸다. 그런데 당시 고메이 천황이 서구인이 싫다며 수결을 미뤘고 천황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막부는 천황을 제치고 조약에 서명하고 만다. 미군 함대는 속절없이 돌아가고 일본 국내 여론은 들끓었다. 외적을 막아야 할 막부가 굴욕 외교를 했다며 강경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막부의 신분제에 복종하던 하급 무사들에게 물가 상승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하자 울분에 찬 탈번이 잇달았다. 오랜 세월 전쟁 없이 평화롭던 일본 열도에 닥친 외세 침략의 공포감은 특히 급격한 사회변화로 손해를 보게 된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서구 열강의 막강한 힘과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일본의 실상을 일찌감치 파악한 일본의 선구자들은 막부 체제로는 외세를 막지 못한다는 주장과 함께 새로운 사상적 토대를 제시한다. 사무라이들은 단순히 막부의 권위상실 정도가 아닌 국가 존폐의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불평분자에 불과했던 젊은이들이 정치적 확신범으로 변모하고 존왕양이의 기치 아래 천황과 국가는 곧 그들의 종교가 되었다. 존양파는 일본이 서양 오랑캐의 위협에 맞서려면 막부의 그늘에 가린 천황 체제로는 한계가 있음을 파악하고 에도 막부를 적폐로 규정하였다. 온건파와 급진파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목표는 같았다. 그런데도 막부는 여전히 근대화를 강행시켰는데, 그 기조는 막부를 중심으로 한 정치 구조는 존속하되 서구의 과학 기술과 병기, 학문 정도를 천천히 도입하자는 온건적 개화였다.

 

막부에 무력으로 맞서 조정의 적이 된 조슈번의 1차 정벌 때 막부가 대군을 움직이자, 죠슈 번은 급진 개화파들을 다 쳐내고 최고위 3명의 중신들이 할복하여 막부에 항복했다. 막부의 승리로 끝나는 줄 알았던 당시 정세는 탈번 낭인 사카모토 료마 등의 노력으로 삿초 동맹, 삿토 맹약 등으로 사쓰마번, 도사번이 조슈번과 손을 잡으면서 일순간에 바뀐다. 여기에 쐐기를 박는 사카모토 료마의 '신정부강령팔책'에 따라 도막파(천황 중심 정부 추구)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압박하여 대정봉환(천황의 대권 회복)에 성공한다. 평화로이 정권이 교체되나 싶던 일본은 사쓰마번의 도발로 내전에 휩싸이고, 신무기와 서양 병제를 먼저 도입한 도막파가 도쿠가와 군을 일본 동북부로 밀어내면서 결국 도쿠가와 막부는 무너진다. 그리고 이듬해인 1868년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면서 메이지 유신이 선포된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2004)가 그려낸 최후의 사무라이는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로, 사무라이 몰락의 시대적 배경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이 정치·경제·군사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과 일련의 대사건을 말하며 그 시기는 메이지(明治) 원년인 1868년으로 지금으로부터 불과 150년쯤 전이다. 당시 일본은 270년 이상 사무라이가 봉건 영주들을 다스리는 봉건제 사회였고, 조선 원정 실패 후 어수선했던 일본을 안정시키고 문화 발전을 이룬 계기로 평가받는다. 정한론을 비롯한 팽창정책으로 주변 국가 특히 우리나라에 잊을 수 없는 잘못을 범하고도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기이한 행태를 보이지만, 메이지유신은 사실상 오늘날의 일본을 있게 한 원동력이자 대변혁으로 근대 일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의 변곡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러한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주도했던 메이지유신의 주요 인물들로서, 저자는 메이지유신의 역사적 관점보다는 각 인물의 개별적 특징에 맞물린 변화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무라이들이 칼 대신 책을 들었다는 이 책의 부제는, 그들이 무사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개항 개국을 이루는 데 전적으로 무력에 의존하지만은 않았다는 반전을 유도하기 위한 은유적 표현으로 읽힌다. 다소 낯설고 긴 이름들이 수없이 등장하기는 하나, 자신을 광인이라 칭하며 시대 변혁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움직이던 지성, 칼을 들었으나 문인을 능가하는 협상과 타협 솜씨, 근대화의 파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통을 끼고 죽어 온 국민의 애정을 한 몸에 받는 낭만적인 반란 수괴, 오늘날 일본 역사의 기초를 닦은 숨은 허드렛일꾼으로 불리는 이들이 위기의 시대를 지탱했던 주춧돌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저자가 서울대 교수이고 서울대의 전신이 경성제국대학이며 뿌리 깊은 식민사관의 원흉으로 우리나라 역사계에 지배적 영향을 끼치는 현실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스럽지만, 적어도 일본과 일본인의 정신적 뿌리에 한 발짝 더 다가가 들여다보고 역사적 통찰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기 충분한 책이다.

 

[골프앤포스트=유선종 칼럼니스트]

관련기사

60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포토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