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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캐디입문

[신입캐디입문1] 캐디의 중요성과 한국의 골프 발전

최초의 캐디는 누구?
골프와 캐디의 관계
역사적 캐디

연재 순서

Part 1. 역사

  제1장 골프 및 캐디 유래

  제2장 현대 골프 역사

  제3장 현대 캐디 역사

Part 2. 골프코스

Part 3. 골프클럽

Part 4. 골프 및 관련 용어

Part 5. 골프 룰: 구제방법과 페널티

Part 6. 캐디생활과 안전

 

[신입캐디입문]은 캐디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길라잡이입니다. 지난 15년간 골프장에서 캐디로, 마샬로, 교육자로 배운 모든 것들을 집대성해서 신입캐디가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합니다. 이 글을 통해서 캐디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배우고 나아가 멋진 전문가 캐디로 존중받기를 기원합니다. - 이동규 기자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캐디교육은 이제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 캐디가 되기 위해 공부할 수 있는 방법들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가운데 신입캐디들이 필드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 가를 보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신입캐디입문]이라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신입캐디 나아가 일반 골퍼들에게도 필요한 글을 쓰겠습니다. - 김대중 기자

 

포어 캐디(Fore Caddy)는 골프 경기에서 공을 찾아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르킨다.

 

"포어(Fore)"는 영국 스코틀랜드어로 "잃어버린" 또는 "실종된"을 의미하며, 경기 중 공이 다른 사람에게 위험하게 간다면 '포어'라고 외쳤다.. 

 

한국에서는 경기 중 공이 위험하게 다른사람에게 갔을 때  '볼'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용어는 '포어'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포어 캐디는 초기 캐디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7세기부터 18세기 초기까지, 골프는 흙으로 덮인 경기장에서 진행되었고, 공을 찾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디는 공을 찾고 회수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캐디로 기록된 사람은 누구였을까?

 

스코틀랜드의 앤드류 딕슨이다. 1681년 스코틀랜드의 리스 링크스에서 열린 영국과 스코틀랜드 골퍼들의 골프 경기(The Duke’s golf match)에서 어린나이에 제임스 7세 요크 공작(Duke of York)의 포어 캐디가 되었다고 한다.

 

요크 공작이 경기 중에 볼을 치면, 앤드류 딕슨이 미리 볼이 올 곳에 가서 볼을 찾아주는 역할을 했다.

 

앤드류 딕슨만큼 초기 캐디로서 잘 알려진 사람은 스코틀랜드 남부 에딘버러(Edinburgh)의 브런츠필드(Bruntsfield)에서 활약한 윌리 군(Daft)이다. 윌리 군은 브런츠필드의 캐디로서도 유명하지만, 외투를 여러 겹 껴 입고 다니는 그의 특이한 복장 때문에 더욱 유명했다.


미국의 최초 캐디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제한적이지만, 골프가 미국에 처음 소개되고 전파되면서, 캐디의 역할이 점차 중요해졌다. 미국의 최초 캐디는 골프가 미국에 도입되고 확산되면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에서는 골프가 빠르게 인기를 얻으면서, 캐디는 골프 경기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최초 캐디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불분명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에서는 많은 프로 골퍼와 캐디가 활동하고 있었다.

 

골프의 역사를 바꾼 가장 커다란 사건은 1913년 US OPEN이다.

 

이 대회를 계기로 골프가 대중화되었으며, 골프가 유럽 특히 영국 중심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결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영국의 자존심 해리 바든과 캐디 출신이며 아마추어 골퍼인 미국의 프란시스 위멧과의 연장 승부를 벌인 경기로 2005년 ‘내 생에 최고의 경기’라는 이름으로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위멧은 1893년에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났으며, 골프를 시작한 것은 어릴 때였다. 그는 당시 골프 세계에서 흔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국제적인 골프 경기에 참여하는 몇 안 되는 미국인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순간은 1913년 미국 오픈 챔피언십이다. 당시 미국 오픈은 영국인 골퍼들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위멧은 20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오픈 챔피언으로서 미국 골프 역사상 처음으로 우승하였다.

 

에디 로워리(Eddie Lowery)는 프란시스 위멧(Francis Ouimet)의 캐디로서 유명한 인물이다. 1913년 미국 오픈 챔피언십에서 위멧과 함께 우승한 대회에서 그의 캐디로 활약했다.

 

로워리는 당시에 아직 어린 소년으로, 당시 10세였던 그는 위멧의 캐디로서 그의 뒤를 따라 다니며 골프 경기에서 그를 지원했다. 특히 1913년 미국 오픈 챔피언십에서, 로워리의 캐디 역할은 위멧이 대회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위멧이 1913년 미국 오픈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이벤트는 골프 역사상 가장 큰 충격 중 하나로 기억되며, 로워리의 캐디 역할은 이 이벤트의 전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로워리는 이후에도 위멧과 함께 다양한 골프 대회에 참여하면서 골프의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한국에서 최초의 골프장은 근대적인 골프의 도입과 함께 조성되었다. 그러나 정확한 최초의 골프장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국에서 골프가 처음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반으로 알려져 있으며, 초기에는 외국인들에 의해 소규모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한국에서 일본인들을 위한 골프장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골프장은 주로 일본인들이 이용하거나 일본인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한국인들의 골프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경제 발전 정책과 함께 골프가 점차 보급되면서, 국내 최초의 골프장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의 골프장은 주로 일부 사업가나 외국인들의 소유로 운영되었으며, 대중들의 이용이 제한적이었다.

 

1921년 6월 1일 한국 최초의 골프장이 용산구에 자리 잡았다. 기록된 사실만 역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로서는 효창원 코스가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코스임이 틀림없다.

 

영국,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 골프계의 전설들도 캐디 출신들이 많다.

 

1941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 오픈에서 우승한 연덕춘, 그의 제자 였던 한장상, 한국 프로골프협회 최다승인 43승을 기록한 최상호, 박세리 이전 한국프로골프의 선구자였던 구옥희도 캐디 출신이다.

프로필 사진
이동규 기자

- 경력 -
포씨유신문 기자겸 부운영자
(주)포씨유 교육총괄이사
글로벌캐디원격평생교육원 교수
(주)골프앤 교육총괄이사
캐디: 휘닉스파크, 웨스트파인, 골든비치
신입캐디교육: 웨스트파인, 골든비치, 오션힐스
마샬캐디: 리앤리
경기과: 샤인데일
마케팅팀: 몽베르
- 저서 -
초보골프캐디를 위한 길라잡이(㈜골프앤, 2020),
캐디가 알아야 할 모든 것(조세금융신문, 2021)
골프, 이 정도는 알고 치자(포씨유, 2024)
- 자격 및 학력사항 -
골프생활체육지도자, (사)골프협회 정회원, HRD 캐디 강사, 건국대학교 골프마스터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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